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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8월 아이가 갑자기 검도를 배우고 싶다며 도장을 알아보고 가게 했다. 코로나가 조금 느슨해질 때라 등록했다가 배우기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확산세로 돌아섰다. 재등록을 하지 않아 아이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다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주 3회 아이들이 가장 적은 시간대에 보낸다.
2개월간의 수련을 거친 뒤 지난주 금요일 첫 승급심사를 했다. 칼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정복과 띠를 단단히 매고 손을 잡고 도장으로 향했다. 어느새 선선해진 가을 밤공기가 기분 좋은 금요일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엄마, 기억이 안 나!라며 걱정했는데 도장에 도착하자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는 분위기에 더 긴장한 모양이다.
함께 수련하는 백대 누나가 오지 않아 혼자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애를 먹었다. 실제로는 잘하는데도 미리 긴장을 하는 편이야. 마지막 연습을 지도하는 관장 앞에서 아이는 진지하게 배운 것을 복습했다. 며칠 전 일이 잘 안 돼 관장님께 혼이 났다는 자세에서 다시 막혔다. 그래도 서서히 검법을 실연했다.
두 번 연습해서 아이는 도장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왔다.뒷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해봐.아이는 알아들을 수 있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다가 곧 형들 곁으로 갔다.
아이가 제일 먼저 심사를 받았어. 긴장된 뒷모습이었지만 침착하게 잘했다. 모든 것이 한자어로 바뀌어 무엇을 뜻하는지 나도 궁금한 용어를 물어 지금까지 배운 대로 칼을 머리 위에서 왼쪽 오른쪽에서 들었다. 하늘을 내려와 기합을 가다듬었다. 간간이 버퍼링이 있었지만 관장이 한 차례 더 기회를 주면서 위기는 넘겼다. 가장 초보지만 시연하는 자세가 많아 가장 오래 심사를 받고 통과했다.
심사가 끝난 아이는 긴장이 풀리고 신이 났는지 나머지 두 오빠를 심사한 뒤 8시 심사에도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형, 누나들 하는 거 보고 싶다는 거였어 한참을 고민한 뒤 금요일 밤이라 남들이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도장에 남았다.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과 부모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타임에는 초등학생 이상이 많아서 부모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도장이 마스크를 쓴 아이들로 가득하다.
8시 심사가 시작됐다. 아이는 함께 수련한 백대 언니와 다시 한 번 시연을 했다. 이제 합격해서인지 누나가 옆에 있어서인지 두 번째는 더 자연스러워졌다. 5세 때쯤 되어 보이는 초록띠 친구들도 귀엽지만 제법 멋지게 시연을 해줬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미소가 흘렀다. 노란 띠부터 가장 높은 급인 3단까지 차례로 오늘날 대상의 검법을 실연하여 테스트를 통과하였다. 한 검은 띠의 소녀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마치 무용 같은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허리에서 가검을 뽑아 허공을 가로질러 도장을 가볍게 뛰어다녔다. 일찍이 다모를 잠깐 보았던 다모 폐인의 추억이 되살아나 검도를 배우고 싶다는 욕구마저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금에 와서는 아들이 나보다 선배일거야. 채옥은커녕 삐걱거리는 온몸이 외치고 관장도 외칠 것이다.
모두가 무사히 심사를 통과했고 기분 좋게 일정이 마무리됐다.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올라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 한 단계 올라섰다는 성취감도 의미가 컸지만 다른 아이들의 과정을 남아서 잘 지켜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변해 죽어도 싫다면 할 수 없지만 이왕 시작한 운동이니 상황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하면 된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하는 운동이라 가끔 요즘 유행하는 노래(대중가요 트로트) 같은 것도 배우고 장난감 아이템도 알게 된다. 무엇을 보고 왔는지 일본 만화를 보고 무섭다며 울상을 짓는 날도 있고, 집에서 고생한 스마트폰 미디어에 노출이 우려되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형제가 없는 아이들은 부모가 상주하는 놀이터에서 늘 배우기 힘든 아이들만의 세계, 질서와 분위기를 배운다. 다 같이 운동하고 자유 시간에 피구와 젠가도 하면서 사회 생활 비슷한 것을 익히고 혼자 또는 비슷한 그 해, 또 다른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관장이 처음 자신의 운동과 도장 운영의 철학을 설명했을 때 선거공약처럼 반신반의하며 들었지만,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관장이 기본수업을 한 후에는 아이들이 도장질서를 가르치고 서로 돕는 분위기가 잘 형성돼 있다. 엄마들끼리, 또는 친하지 않으면 모른 척하고 좀처럼 들어갈 수 없는 놀이터와는 다른 자기장이 이 몇 평 남짓한 도장 공간에서 흘러나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위에는 사교육에 불신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부모가 과도한 학습목표를 추구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면 적절한 사교육 시스템의 활용은 좋을 것 같다. 아이가 더 어릴 때는 친구들을 위해 학원에 간다는 말을 듣고 슬펐는데 막상 그 시기가 되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수긍이 갔다. 그게 꼭 나쁜 것뿐일까. 엄마의 표로 아무거나 되는 게 아니라 운동의 경우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도 아이들은 뭔가를 배운다. 원래 배우러 간 거 말고도 다른 걸 다양한 방법으로. 함께 부딪치고 서로 돕고, 또 성장한다.
엘리베이터에 내리면 늘 엇갈리는 옆 라인의 헬스클럽 관장과 하이파이브를 치면서 누군가의 호감, 그곳에서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느끼고, 항상 자신을 오냐오냐 하는 집의 어른 대신 따끔하게 말하는 검도관 관장 같은 사람을 통해 지켜야 할 선을 배우고, 나이 차이가 훨씬 나는 사춘기 중학생 누나의 시크한 무관심을. 자신보다 잘하는 사람을 동경해서 나의 다음을 가늠해보곤 한다.
여러 가지가 합쳐져 검도 실력과 함께 축적되는 시간, 때론 동작이 뜻대로 되지 않지만 관장의 호통소리에 눈물이 나고 의기소침해지지만 관장이 건네준 편의점의 포도에이드를 갑자기 눈여겨보는 매콤함이 아이에겐 어려운 동작을 이어가는 작은 힘이 되는 것 같다. 그 시간을 적당한 관심과 적절한 무관심으로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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